정혜인 플리마인드 대표, 20인치 비닐 봉투에 담긴 전쟁의 공포
인지적 종결이라는 비상구

올해 봄은 상춘객의 나들이로 산과 들이 분주하기보다, 느닷없는 '종량제 봉투 사재기' 대란으로 집앞 마트가 더 북적인다.
갑작스러운 수요에 대해 정부는 재고가 충분하다며 안심시키지만, 이상하게 넘쳐나던 봉투가 보이지 않는다. 평소 아무 생각 없이 집어 들던 종량제 봉투는 어느새 우리 불안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지도 위에서 호르무즈 해협과 한반도는 8,000km라는 물리적 거리로 떨어져 있다. 유조선이 보름 넘게 달려와야 닿을 수 있는 거리다.
그러나 이 물리적 간극이 스마트폰의 푸시 알림 하나로 순식간에 무너진다. 객관적으로 보면 전쟁의 위협과 쓰레기봉투 확보 사이에는 커다란 인과적 간극이 있다. 그럼에도 심리학의 렌즈로 들여다보면, 이 풍경은 낯설지 않은 생존 본능의 발현이다.
인지적 종결을 갈구하는 인간에게 전쟁은 더 이상 먼 나라의 포성이 아니다. 그것은 당장 내일 마트에서 종량제 봉투가 사라질지 모른다는 생활의 불안으로 번역된다.
물리적 거리가 멀수록 우리는 오히려 더 무력해진다. 직접 개입할 수도, 정확히 예측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커진 무력감은 종종 가장 사소하고 손에 잡히는 물건에 대한 집착으로 변한다.
인간이 견디기 가장 힘들어하는 것은 ‘전쟁 그 자체’보다도 ‘이 일이 내 삶을 어떻게 바꾸게 될지 알 수 없다’는 인지적 혼란이다. 우리의 뇌는 모호함을 생존의 위협으로 받아들이고, 그 불편을 줄이기 위해 필사적으로 결론을 찾으려 한다. 어떻게든 안전함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아리에 크루글란스키의 ‘인지적 종결 욕구’ 개념이 유효해진다. 사람은 복잡하고 불확실한 상황을 오래 견디기 어려워하고, 어떤 방식으로든 명확한 답을 내리려 한다. 안타깝지만 국제 정세는 개인이 이해하고 통제하기에는 지나치게 거대하고 복잡하다.
그래서 누군가는 “어차피 세상은 망할 것”이라는 비관적 확신으로 상황을 단순화하고, 또 누군가는 “일단 봉투라도 사두면 안심”이라는 가시적 행동으로 불안을 정리하려 한다.
종량제 봉투는 그런 점에서 불안을 투사하기에 꽤 적절한 대상이다. 유통기한이 없고, 언젠가는 반드시 사용되며, 손에 쥐는 순간 ‘확보했다’는 감각을 준다.
전쟁이라는 대처 불가능한 불안을 봉투 구매라는 통제 가능한 과업으로 바꾸는 순간, 우리의 뇌는 잠시나마 “상황이 정리되었다”는 신호를 보낸다. 물론 그것은 실제 해결이 아니라, 불안을 다루기 위한 임시적인 심리 기제에 가깝다.
이런 ‘가짜 종결’은 즉각적인 안도감을 준다. 비어가는 진열대 앞에서 카트에 봉투를 채우는 순간, 우리는 잠시 전쟁의 공포로부터 벗어난 듯한 착각을 경험한다.
심리학적으로 이는 ‘일차적 통제(Primary Control)’의 시도라고 볼 수 있다. 내가 바꿀 수 없는 거대한 세계 대신, 내 손이 닿는 물리적 환경을 바꿈으로써 ‘나는 아직 대응할 수 있다’는 감각을 회복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불안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공기보다 빠르게 전염된다. 내가 아무리 이성적으로 ‘봉투는 충분하다’고 믿고 있어도, 카트 가득 봉투가 담긴 타인을 마주하는 순간 우리의 뇌는 비상벨을 울린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사회적 증거(Social Proof)’가 작동하는 것이다. 정보가 불확실할수록 우리는 타인의 행동을 정답처럼 받아들인다. 그리고 ‘나만 아직 상황을 모르는 것이 아닐까’라는 또 다른 불안에 휩싸인다. 그렇게 사재기는 개인의 불안을 넘어 집단적 공포로 번져간다.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사소한 물건에 집착할수록 오히려 우리가 감당하지 못하는 불안의 크기는 더 선명해진다. 호르무즈 해협의 긴장이 실제로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차분히 판단할 인지적 여유가 사라질 때, 인간은 가장 원초적인 저장 본능으로 후퇴한다.
결국 사재기는 경제적 선택이라기보다, 복잡한 인과관계를 감당하지 못한 뇌가 택한 인지적 회피의 결과에 가깝다.
불확실한 시대에 정말 필요한 심리적 근력은 모호함을 성급한 결론으로 봉합하지 않고 견뎌내는 힘이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내 삶에서 통제할 수 있는 것과 통제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해야 한다.
내가 관심은 있어도 바꿀 수 없는 문제에 에너지를 쏟기보다, 오늘의 수면 시간, 내가 맡은 일, 가족과의 식사처럼 직접 돌볼 수 있는 삶의 영역으로 주의를 되돌려야 한다.
또한 8,000km의 물리적 거리를 무력화하는 디지털 자극에서 한 걸음 물러서는 정보적 거리 두기가 필요하다. 우리를 지탱하는 것은 거대한 세계를 다 아는 능력이 아니라, 흔들리는 바깥과 별개로 반복되는 일상의 리듬을 지키는 힘이다.
아침을 깨우는 물 한 잔, 잠들기 전 짧은 일기, 정해진 시간의 식사 같은 작은 루틴은 뇌에 예측 가능하다는 신호를 보낸다.
그 예측 가능성은 모호한 시대를 버티는 가장 현실적인 심리적 닻이 된다. 우리가 통제해야 할 것은 종량제 봉투의 개수가 아니라, 불확실성 앞에서 무너지지 않도록 나의 반응과 일상의 질서를 잘 붙들어 두는 힘이다.

[프로필] 정혜인
심리학자 출신의 그는 국내 최초로 온라인 심리지원 전문 기업 '플리마인드'를 설립하며 주목을 받았다. 플리마인드는 정신건강 상태를 스스로 진단하고 모니터링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개발하고, 자가 정신건강 관리를 위한 다양한 콘텐츠 제작에 주력하고 있다.
현재 그는 주식회사 플리마인드의 대표를 맡고 있으며, 사단법인 한국심리건강진흥원 이사장으로서 정신건강 증진을 위한 공익 활동에도 힘쓰고 있다. 또한 서울사이버대학교 겸임교수로 활동하며 후학 양성에도 기여하고 있다.
이 외에도 한국IT여성기업인협회 수석부회장으로서 여성 기업인의 성장을 지원하고 있으며, AI윤리협의체 의장으로서 인공지능 시대의 윤리적 가치 정립을 위한 논의에도 앞장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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