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메달리스트인 유명 펜싱 선수가 사기극의 피해자가 된 이야기로 대한민국이 소란스럽다. 3자가 보면 의아할 만한 일들을 어떻게 속을 수 있을까, 함께 있었으면서 어떻게 진실이 무엇인지 모를 수 있을까 하는 의문들이 대중들 사이에서 가득하다. 어떻게 그런일이 있을지 의아해 하는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하나의 답변은, 해당 선수가 '가스라이팅'을 당했다는 것이다.
'가스라이팅' 만으로 거대한 사기극에 휘말릴 수 있을까. 정말 '가스라이팅'은 사람을 아무것도 의심할 수 없게 하는 것일까.
가스라이팅이란?
거부, 반박, 전환, 경시, 망각, 부인 등 타인의 심리나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해 그 사람이 현실감과 판단력을 잃게 만들고, 이로써 타인에 대한 통제능력을 행사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정신적 학대의 한 유형으로, 친구·연인·가족 등 친밀한 관계는 물론 학교나 직장 등에서 주로 발생한다고 알려져 있다.
가스라이팅 가해자는 피해자의 자존감과 판단 능력을 잃게 만든다. 이러한 과정에서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정신력이 약해진 피해자는 가해자에게 더욱 의존하게 된다는 특징이 있다. 특히 가해자는 피해자를 위한다는 명목하에 가스라이팅을 진행하기 때문에 피해자 대부분은 자신이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있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
용어의 유래는?
가스라이팅은 1938년 패트릭 해밀턴 작가가 연출한 스릴러 연극 <가스등(Gas Light)>에서 유래된 '정신적 학대'를 일컫는 용어이다.
이 연극은 잭이라는 남성이 자기 아내(벨라)를 억압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잭이 보석을 훔치기 위해 윗집의 부인을 살해하면서 시작된다. 이 보석을 찾기 위해서는 가스등을 켜야 했는데, 이렇게 하면 가스를 나눠 쓰던 다른 집의 불이 어두워져서 들킬 위험이 있다.
이 때문에 잭은 집안의 물건을 숨기고 부인인 벨라가 물건을 잃어버렸다고 몰아간다. 잭이 보석을 찾기 위해 가스등을 켤 때마다 벨라가 있는 아래층은 어두워지고, 벨라가 집안이 어두워졌다고 말하면 잭은 그렇지 않다는 식으로 아내를 탓하는 것은 물론 정신병자로까지 몰아세운다. 이에 아내는 점차 자신의 현실인지능력을 의심하면서 판단력이 흐려지고, 남편에게 더욱 의존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이 연극은 1940년 영국에서 먼저 영화화됐고, 1944년 잉그리드 버그만이 주연한 동명의 영화를 통해 더욱 알려지게 되었다.
가스라이팅 과정 및 사례
가스라이팅 가해자는 피해자의 기억을 지속적으로 '반박'하거나 실수를 과장하는 왜곡을 통해 피해자가 스스로를 의심(‘전환’)하게 만든다. 또 피해자의 요구나 감정을 하찮게 여기거나(‘경시'), 실제로 발생한 일을 잊은 척 하거나 부인하는(’망각’) 행위를 지속한다.
예를 들어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당신 말은 틀렸어.", "너의 기억은 잘못된 거야.", "너는 너무 예민해.", "네가 문제라는 걸 모르겠니?" 등의 말을 반복해 피해자가 자존감과 판단 능력을 잃게 만든다. 여기에 가해자는 피해자의 말을 듣기 '거부'하고, 피해자의 생각을 '무시'한다.
이러한 행위가 점진적으로 이어지게 되면 피해자는 가스라이팅에 익숙해지면서 가해자의 생각에 동조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의심하게 되면서 자존감이 점차 낮아지며, 스스로 정확한 판단을 내리는 능력을 상실하게 되면서 일상생활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특히 이 과정에서 가해자는 피해자를 사회적으로 고립시키게 되고 피해자는 이로 인해 우울증을 겪는 경우가 많은데, 최악의 상황에서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겪기도 한다.
이러한 가스라이팅은 가정, 학교, 연인, 군대, 직장 등 주로 밀접하거나 친밀한 관계에서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보통은 수평적이기보다 비대칭적 권력으로 누군가를 통제하고 억압하려 할 때 가스라이팅이 이뤄지게 된다. 예컨대 가정(부모/자녀)의 경우 부모가 자녀를 지나치게 통제하는 경향을 보이고 오히려 자신을 피해자로 만드는 형태 등으로 나타난다.
“다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야.”, “너는 착한 딸(아들)이잖아.”, “아이고, 다 너를 낳은 내 죄지.” 등의 표현이 이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연인 간에서는 “나 아니면 누가 너를 만나겠니?”, “네가 너무 예민한 거야.”, “옷을 왜 그렇게 입고 다녀? 앞으로 그런 건 입지 마.” 등 사랑을 명분으로 심하게 간섭하거나 강요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직장(직원/상사)에서는 “왜 이렇게 일을 못해? OO 씨에게 능력 밖의 일 아닌가?”, “이 회사 나가면 어디 갈 데가 있을 줄 알아?”, “회사 내에서 OO 씨에 대해 안 좋은 얘기가 많이 들리는데” 등의 무시하는 언행 등이 해당 사례에 해당한다.
가스라이팅, 어떻게 대처할까?
정신분석가이자 심리치료자인 로빈 스턴은 2008년 저서 《가스등 이펙트》를 통해 가스라이팅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왜곡과 진실을 구분하기 ▷상대방과의 대화가 소위 '밀당(밀고 당기기)'이라면 피하기 ▷옳고 그름 대신 '느낌'에 초점 맞추기 등이 필요하다고 제시하였다.
전문가들은 스스로 가스라이팅 피해자라는 사실을 자각한다면 얼마든지 가스라이팅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 우선 피해자 스스로가 자신이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 보고, 그렇다는 생각이 들면 상대와 거리를 두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피해 자각과 거리두기가 이뤄진 다음에는 상황을 객관적으로 봐줄 수 있는 전문가 등 제3자나 조력자를 찾아 그 피해 사실을 알리고 도움을 받아야 한다. 또 타인에 의해 내 인생이 좌우되지 않도록 자존감을 회복하고 내 삶에 대한 뚜렷한 주인의식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