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학 집중조명2] '치유', 생으로 나아가기 위한 기다림
뜻하지 않은 병에 대한 대비에서 시작한 한의학
한의학의 본질은 '건강한 삶' 에 있어
['한의학' 이라고 하면 특별하거나, 생소할 것입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이 땅에서 함께한 의학인데도 말이지요. 오래전부터 함께 했다는 그 이유만으로 한의학은 매우 고전적인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거기에 더해 수술을 하지 않아 수동적이라고 생각하기 십상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한의학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사람들의 곁에서 함께 걸으며 발전해 왔습니다. 그 발전을 인정받아 '한의학'을 영어사전에 검색하면 'Korea medicine' 이라고 표기돼 있습니다.
여기, 더욱 건강한 일상을 지키기 위한 한의사들의 모임이 있습니다. '모든 병의 근본 치료' 라는 뜻의 'MOBON(모본)' 입니다. MOBON에는 같은 뜻을 가진 한의사들이 모여, 자신들의 임상연구를 공유하고, 현대사회의 질병에 대해 연구하고 치료제를 개발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노력으로 많은 이들이 아프기 전에 쉽고 가깝게 한의원을 찾아 상담을 받고 건강한 삶을 영위하기를 바랍니다.
평균 기대수명이 늘어난 현대 사회에 MOBON은 '한의학'이 더욱 사람들의 삶속으로 밀접하게 들어가 1차 진료기관의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 역할이 크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K-medicine의 길이 있다고 믿습니다.
주 2회, 월요일과 목요일 'MOBON'의 이야기를 전하고자 합니다. -편집자주-]
한 숨 자고 일어나면 괜찮을 거야. 이 말을 우리는 어려서부터 많이 듣고 살았다. 넘어져서 어딘가를 다쳐 울고 들어왔을 때, 어른들은 아이를 재웠다. 성인이 되어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부대끼며 마음에 상처를 입었을 때도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말 한다. 한 숨 자고 일어나면 괜찮을 거라고. 다독이며 재운 아이는 깨어나서는 이내 괜찮아져서 생글생글 웃는다. 한 숨 자고 일어나면 사람 사이에서 받았던 상처는 어제의 이야기가 되고 또 하루를 살아갈 힘을 얻는다. 도대체 잠이 뭐라고. 신기한 일이다.
잠을 자는 시간은 몸에서 쓰는 에너지를 최대한 줄여 오로지 치유와 회복에만 집중하고 쓰는 시간이다. 잠 자는 동안 사람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우리의 몸은 역설적이게도 무언가를 하고 있다. 사람이 고유하게 갖고 있는 자연치유의 힘이 자는 동안 쓰지 않는 에너지의 자리를 채운다. 이러한 잠이 주는 조금 더 ‘완전한 치유’를 위한 시간에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오직 ‘기다림’ 만 있을 뿐.
아픈 사람에게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다 하고 나면 기다림이 남는다. 치료는 인위적인 치료에서 자연치유로 넘어간다. 양방이든, 한방이든 이 시점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치료에도 사람이 개입할 수 없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 한계를 넘어서게 하는 것이 있다면, 처음부터 아프지 않아야 하거나 아프더라도 자연치유를 앞당기도록 몸이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한 번 아프거나 크게 다치면 죽음에 가까운 것이었던 오랜 옛날부터 사람들을 지켜보고 치료했던 임상의 결과로 한의학은 몸이 ‘뜻하지 않게 닥칠 병에 대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병이 우리를 공격하기 전에 먼저 공격의 기미를 차단하는 것이 최선의 치료라고 믿었고 그렇게 인간의 몸을 보호해 온 것이 바로 ‘한의학’이다.
약, 칼, 불, 안되면 불치
흔히 ‘~의 아버지’라고 하면 무언가의 시조를 말하는데, ‘서양의학의 아버지’라고 하면 우리는 무조건 히포크라테스를 떠올린다. 어렴풋이 서양의 ‘명의’, 전 세계 의과대학의 졸업식에서 시행하는 선서로 유명한 사람 정도로 알고 있다. 그가 전 인류의 그것도 인종을 초월해서,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데 아무튼, 무조건, ‘아버지’가 된 것은 그가 종교적이고 신비한 일의 영역인 ‘사람을 살리는’ 것을 학문으로 끌어 올렸기 때문이다. 히포크라테스는 질병을 학문의 개념으로 분리하여 의학의 과학성을 더 중시하여 병에 걸리면 기도를 할 것이 아니라 의학적으로 치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기원전 약 400년대를 살아간 사람임을 생각하면 매우 합리적인 생각을 했음이 분명하다.
“약으로 고칠 수 없는 병은 칼로 고칠 수 있으며, 칼로 고칠 수 없는 병을 불로 고칠 수 있다. 그리고 불로 고칠 수 없는 병은 불치의 병이라고 여겨야 한다.”
히포크라테스 전집에 나와있는 말이다. 현대의 시각으로 봤을 때 이 말은 매우 소극적 치료인 듯 보인다. 하지만, 병의 치료의 수순에 있어서 진리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도 흔히 병이 나면 약을 먼저 먹는다. 대부분은 여기서 괜찮아진다. 그러나 약을 먹는 것으로 해결이 되지 않으면 병원을 찾는다. 병원에서 주는 약은 뭐 다르겠냐마는, 식사와 함께 꾸준히 먹는 약은 분명히 몸에 규칙적으로 작용한다. 그러니 조금 더 확실한 치료 효과를 볼 수 있다. 그러나 병원을 제법 다녔는데도 병이 낫지 않으면 이제 상황은 복잡해진다. 많은 검사와 진단, 그리고 수술이 기다리고 있다.
수술을 하면 좋아지는 경우를 많이 본다. 몸 안이든 밖이든 좋지 않은 것을 제거하거나 혹은 잇거나 뚫어주거나 이식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그때부터 더 이상 건강을 잃지 않기 위한 치열한 사투가 벌어진다. 생을 향한 환자의 사투이다.
환자는 다시 수술 이전의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서 애쓴다. 회복 후에는 같은 병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 수술로 인한 보상작용으로 다른 부분이 약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또는 전이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노력한다. 자연스러운 자신의 생이 다 할 때까지, 죽을 힘을 다해 생에서 한 발이라도 멀어지지 않기 위해 애를 쓰게 된다. 이제는 한 숨 자고 일어나서 될 일이 아니다. 말 그대로 사투이다. 살아있음에도 생을 걸고 벌여야 하는 죽음과의 전투, 사투(死鬪). 고대의 그가 ‘불치의 병’ 이라고 한 것은 이를 두고 한 말 일지도 모를 일이다.
사투(死鬪)에서 일상으로
건강하게 사는 것은 무엇일까. 사람들은 건강을 잃기 전에는 건강함에 대해서 아무렇지 않게 생각한다. 오늘을 어제처럼 사는 것. 무탈하게 아무 일 없이 하루를 살아냈으면 건강하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무탈하게 오늘 하루를 살기 위해서 우리 몸은 끊임없이 어떻게든 조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한다. 신체의 각 부분이 유기적으로 어우러져 서로 잘 주고받으면서 그렇게 몸의 전체가 무엇 하나 부족함 없이 이루는 조화. 이 조화가 조금이라도 깨지거나 한 부분이 부족하면 몸의 조화는 무너지고 만다.
조화가 무너졌다고 사람이 무조건 병이 드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인간은 지금쯤 멸종 위기이거나 멸종되지 않았을까. 사람에게는 놀라운 ‘자연치유력’이라는 것이 있다. 감기에 걸렸을 때 며칠을 쉬면 낫는 것, 피부에 상처가 났을 때 자연스럽게 딱지가 지고 새살이 돋는 것이 다 인간이 가진 자연치유력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딘가가 아프면 바로 약을 먹기 보다는 조금 기다린다. 자연적으로 치유되기를. 내 몸의 자연치유력을 믿기 때문에.
외과적인 수술을 한 사람 역시 이러한 자연 치유력이 있다. 우리의 자연 치유력은 몸의 외부 뿐 아니라 내부에서도 작용하고 있다. 장기에 입은 상처는 아물고, 이어 놓은 혈관에서는 피가 통한다. 끊어진 근육도 이어 놓으면 붙는다. 상처를 꿰맸다는 것은 상처의 '자연치유력'을 앞당기도록 도울 뿐이다.
삶을 위해 사투를 벌이는 이들은 많은 약을 먹는다. 처음엔 A를 위해서 먹은 약이, B에 무리가 가므로 B의 무리를 줄이기 위해서, B에 무리를 줄이기 위해 먹는 약이 C에 부작용이 생기므로 그것을 막기 위해, C의 부작용은 D의 일부에 영향을 주므로 그 영향을 안 주기 위해서…약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사투의 현장에 나타난다. 마치 돌려막기의 달인과도 같다. 그렇게 사투를 벌이는 이들이 하루에 먹는 약을 손바닥에 쏟아보면 한 줌이 넘기도 하다. 어떤 이는 약을 먹으면 배가 부르다고 하기까지도 한다.
이것은 사투일까, 연명일까. 이제는 그 경계가 모호하다. 약의 개수를 줄여보기 위해 노력하기 보다는 약에 더 많은 의존을 한다. 혹여라도 한 개의 약을 덜 먹을까 봐 잘 챙겨서 먹는다. 그날 먹어야 하는 약을 먹지 못하면 큰 일이 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어디를 가든 약을 챙겨 가지고 다닌다. 어쩌다 약을 챙기지 못하면 그날의 일정은 이미 망가져 있다. 몸의 조화는 고사하고 내 생활의 조화도 망가져 있다. 망가져 있는 생활의 조화를 조금 더 나은 쪽으로 개선하려는 이는 드물다. 약을 조금이라도 덜 먹는 것, 약의 개수를 줄여 결국에는 먹지 않으려고 하기보다는 지금 먹는 약에서 더 늘어나지만 않게 하기 위해서 약을 꼬박꼬박 먹는 일에 최선을 다한다. 혹여라도 지금 먹는 약을 줄이기 위해서 한의학으로 자신의 병을 고쳐볼까 하는 생각의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우리가 몸의 건강을 위해서 애쓰는 이유는 결국 ‘보다 더 나은 삶’을 살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건강’에는 일차적인 의미의 몸의 건강만을 말 하는 것이 아니라 내 몸을 둘러싼 모든 환경이 조화를 이룬다는 말을 내포하고 있다.
단순히 몸의 기력이 쇠한 곳을 보강하여 병을 고치는 것에만 집중하는 ‘한방’이 아닌, 삶 자체를, 오롯이 삶을 살아가는 사람의 것으로 두는 것.
우리가 오늘을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는 것처럼 내일도 그렇게 이어지도록 돕는 것이 한의사들이 가장 주목하는 부분이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한의학적 치료는 인간을 자연의 일부이며 하나의 우주로 보았다. 병이 생기면 인간이라는 자연이 왜 자연스럽지 못한 것이며 그 우주의 어느 부분이 조화롭지 못한지를 따져 조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해 온 것이 ‘한의학’이다.
인간의 몸 어디 하나에도 상처 내지 않고 온전한 상태로 두어 어떤 치료도 인간에게 이익이 되도록 ‘한의학’의 치료는 그렇게 내려왔다.
모본의 한의사들은 충분히 ‘한방’으로 건강을 잘 관리한다면 양방의 치료약을 조금이라도 더 늦게 먹을 수 있거나 점점 줄여나갈 수 있다고 말한다. 몸을 보충하고 면역력을 높여 병에 잘 걸리지 않도록 하는 예방의학적인 면이나 만성질환이나 원인을 알 수 없어 호전이 되지않는 질환일 경우 한방의 치료가 유효한 경우가 많다. 모본의 한의사들은 한방’으로 질환을 진단하는 다른 기준은 매우 중요하다고 말하며, 이러한 기준이 양방의 치료와 함께 치료현장에 적용되었을 때 결국 환자들이 가장 큰 혜택을 보게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환자들에게 더 편하고 효과적인 치료를 선택할 수 있도록 열린 자세로 보여주는 일은 의료인의 의무이자 '한의사들’의 역할이다. 현대의 한의학은 환자와 동반자적인 유대관계를 가졌을 때 진단과 치료효과가 높다. 여기에 환자들이 보다 편안하고 효과적으로 한방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발전된 치료기술을 적극 도입하여 임상에 적응시키고 임상 발표를 공유하며 발전해나가고 있다. 또한 한약 공동조제의 과정을 통해 안정적인 좋은 탕약의 확보도 노력하고 있다. 그 중심에 모본의 한의사들의 역할이 크다. 모본이 그동안 진단과 근거에 중심이 되었던 학회활동에서 벗어나 30년 이상의 치료현장에서 느꼈던 발전된 치료제제의 공동개발 과제를 통해 ‘치료 중심’의 한의학의 선두주자로 나서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제는 병과 치료가 사투에서 생의 한 가운데로 옮겨가야 할 때다. 그곳에 모본의 한의사들이 있다.
‘모본’, 이제 삶 속으로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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